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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와 학술단체에서 주목받는 선생 역할을 25년간 해오다,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적이 세 번 있었다. 갑자기 닥친 뜻밖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클레스를 폐쇄하기까지 했던 그 심각했던 경험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일 대 일 내밀한 분석 관계에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온 '정신분석 세팅'이 '정신분석 교육' 집단에서도 중요 기능을 하는구나! 라는 자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세팅(setting)'이란 어떤 관계가 여러 (돌출적) 방해요인들에 의해 파국에 처하지 않게 보호해주는 기능을 하는 '구조적 환경 조건'을 의미한다.] 정신분석 강의를 할 때마다 과거에 겪은 실패 흔적은 내 영혼 어딘가에 자리해 있다가, 과거와 유사한 자극이 지각되면 심신의 불편함을 일으켜 '주의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한 흔적을 되새겨 본다. 9년동안 4계절 내내 일반인에게 정신분석 강의를 하던 어느 학술단체에서의 일이다. 나는 '무의식'에 관심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정신분석을 익명으로 편안히 경청할 수 있고, 진지한 질문은 기꺼이 존중해 즉시 답해주는 수업 환경을 만들었다. 그런 공부환경은 실은 정신분석을 몹시 알고 싶어 했다가 좌절당했던 과거의 내 자신이 폐쇄된 한국정신분석학계에 바라던 환경이었다. 행운스럽게도 미국 Chicago 대학교와 그곳 워크셥 공간들에서 1년 내내, (한국이 공인한 연구학자라는 조건 덕분에) 정신분석 입문자로 배려받으며 부담없는 공부환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의 효능' 덕분인가? 정신분석 교실은 그 단체가 존속했던 9년 내내 늘 진지한 익명의 구성원들로 꽉 찼었다. (수강신청서에 기입된) 클레스 구성원들의 색깔은 참 다채로왔다. 심리학자, 정신과 수련의, 다양한 유형의 심리치료사, 작가, 예술가, 주부, 교사, 학생, 사회운동가, 익명자... 그런데 이런 사회적 구분보다, 내면에 오래된 고통을 지닌 분들과 그 고통의 원인과 의미에 관심과 대결의지를 지닌 다양한 인격 유형의 분들로 구성되었다고 묘사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하다. 당시 내게 종종 들려온 익명의 소리들 "선생님은 참 희안하세요. 어떤 유형의 정신병리를 설명하시더라도, 마치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을 전해주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아요. 어찌 그러실 수 있는지, 그 모든 병들을 다 겪으신건지..." "정신분석을 들으러 오는 일주일의 하루는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해방된 느낌을 받아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오직 내 자신을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요...내 문제가 적나라하게 보일 땐 매우 심란하기도 하구요." 그러던 어느날이다. 보통의 질문 톤과 구분되는 어떤 색다른 목소리가 강의 공간을 울리기 시작했다. 보통사람의 방어경계를 넘어 마음속을 투명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언어표현들...어색하지만 놀라웁다! (그를 '투명'씨라 칭하겠다.) 투명씨의 질문에 정성껏 응답하자...그녀의 질문은 매 회기 계속되었다. 그 질문에는 강한 실존적 고뇌가 담겨있었고, 클레스원들에게 인간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교육적 가치가 있었기에, 내 정신은 기꺼이 존중하는 마음으로 화답하였다. 얼음 같던 그녀의 얼굴에서 화색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마음속을 투명하게 직관하고 있는그대로 표현하는 그 색다른 능력에 나 역시 호감이 갔다. 포기한 채 마지못해 살아온 인생이 나름의 원인과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정신분석'에 무한히 감사한다는 말, 중년에 이르러 삶을 처음으로 되찾은 느낌이라는 말...정신분석과 연관해서 무엇이든지 기여할 기회를 달라는 투명씨의 애절한 요청에, 어느덧 마음이 쏠려 정신분석 수업 녹취를 맡길 생각까지 하던 나. 아무튼 투명씨도, 클레스 구성원들도, 선생인 나도 모두 자신과 인간영혼의 심연 깊숙이 접속하는 새롭고 활기찬 만남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에 대한 투명씨의 애착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느껴져, 좋긴 하지만 절제해야된다는 마음이 언뜻 들던 어느 날이다. 강의하는 건물 주차장 입구에서 "선생님 지금 오세요!"라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운전하면서 차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그녀의 얼굴에서 정신분석 선생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착이 느껴진다. 무심한 듯 눈 인사만 하며 강의실로 먼저 올라간 나. 마음 속으론 "열심히 공부하고 수업에도 공헌하는 투명씨에게 선물로 언젠가 때가 되면 그녀의 마음 짐을 덜어주는 정신분석의 비법을 아낌없이 전해 주어야지..."하는 훈훈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수업시간이다. 그날의 강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따라 수업 중 투명씨의 질문 태도가 매우 들뜨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불편함을 참는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다. 지난 일년간 투명씨의 질문과 자기표현은 클레스원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좋은 에너지를 제공했었다 그런데 그날의 표현들은 너무 개인적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 강해, 수업에서 각자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 싶어하는 타인들의 마음과 충돌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어쩌면 그동안 사람들이 (특정인을 배려하는 선생의 태도 때문에) 짜증을 말없이 눌러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운명의 장난인가? 그날따라 그녀는 그런 주위 기운들을 유독 지각하지 못한 채, 마치 오직 정신분석 선생과 둘 만의 (환상적) 공간 속에 있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내 무의식에서 복잡한 뭔가가 작동되었고, 투명씨를 향해, "오늘 질문이 너무 과하네요, 지금 질문은 나중에 다시하고, 다른 분들도 궁금한 게 있으니 질문 기회를 다른 분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기회의 공정성을 고려해 한 분이 세 번 이상 질문하는 걸 금합니다." 잠시 침묵. 투명씨의 뜻밖의 항의. "그 규칙을 왜 하필 오늘부터 저에게 적용하시는 겁니까. 제 질문은 저의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심각한 것인데, 왜 그걸 거부하시는 겁니까!" 잠시 침묵. 선생의 조금 냉냉한 반응. "오늘 질문은 과도하니, 그렇게 이해하세요..." 침묵, 그리고 다른 수업참여자의 반응. "제가 느끼기에도 선생님 말씀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난 투명씨의 발작. "고통을 호소하는 한 인간의 질문에 공감하지도 답해주지도 않는 선생과 이따위 클레스가 무슨 존재의미가 있습니까~ 그 대답 이젠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순간. 클레스엔 쇠덩어리가 내리누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뜻밖의 사태에 놀래 마비된 영혼들. "아니 저 사람이...왜 하필 그대가...'경계선'을 넘어서 버리면 어떻게 해...!" 누군가를 더이상 배려하거나 신경쓰고 싶지 않은 낯선 정서에 뭍혀, 순간 강의를 종료한 나. 더이상 카리스마 넘치던 듬직한 선생도 인정 많던 선생도 아닌 상태로, 강의실에서 나와 강사용 칸막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교실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업 중 선생의 말에 동조했던 사람에게 다가가 정신을 난도질하는 경악스런 욕설을 퍼부은 투명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정신이 멍~하다. "대체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녀는 알까? 순간 메마른 눈물이 잠시 흐르고...선생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간절히 흡수하고 싶어하던...애틋한 인간의 흔적들이 영혼에서 연기처럼 지워지는...비극의 서곡이.." 그 날 이후 투명씨는 나에 의해 정신분석 클레스 참여를 금지 당했다. 간절한 사과와 간청에도 불구하고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복잡하다. (과거에 있었던 더 곤혹스런 사건 흔적들이 이 번 자극에 결합되어 증폭되었고,.) 그동안 휴머니즘으로 정신분석 수강자들을 포용하던 교육자의 관점이 병리성을 냉철히 진단하는 정신분석가의 관점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타인에게 피해 준 사람은 반드시 그만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준엄한 심판자의 소리가 내부에서 작동되었다. 투명씨에겐 자신과 타자 사이의 '경계'지각력이 (파괴욕동과 분열작용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미미하였고, 타인의 마음속을 넘나들며 공감받으려 드는 투사적동일시가 과민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그로인해 "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을 대할 때마다 상대의 속마음이 마치 내 마음보듯 부담스럴 정도로 쓱 투명하게 보이고 느껴져요! 그 불필요한 강한 자극들이 지겹고 고통스러워 벗어나고 싶어요!"라는 말을 자주 뱉곤 했다. 아울러 대상(선생)을 절대구원자로 이상화(all Good)했다가 사소한 부정적 자극에 의해 '해리'상태에서 극도로 평가절하(all Bad)하고, 자신과 동등한 여러 주체들이 공존하는 주위현실을 망각한 채 분열된 공격성을 집단과 특정 대상을 향해 마구 내뿜은 그날의 돌발 행동은, '경계'지각력과 욕동통제력을 상실한 심각한 경계선 인격장애와 정신증의 징표였다. 그녀의 민감한 '자기'는, 자신의 그런 특성들이 자기 탓이 아니라 운명적인 과거 원인들에 기인하는 거라고 해석해주며 정성스런 관심과 공감 반응을 해주던 정신분석 선생을 향해, 난생 처음 '자기'의 구조적 결함을 보충해주는 강력한 '이상화 대상' 반응을 하였었다. 그날의 우연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온전히 이해받지 못해온 분열된 자기 삶의 비밀들을 풀어주는 정신분석 강의를 경청하며, 하나씩 (아르바이트로) 녹취하면서, 정신분석 선생과의 안정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신을 응집하고 통합하는 (개인적 직업적) 경험을 꾸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릇 '말'과 '氣'라는 것이 자기 몸 밖으로 뱉어져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되면, 결코 주어담거나 원상태로 보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투명씨는 (좋은 것을 혼자만 독차지 한 채 주지 않고 있다고 느껴진 '대상'을 향해) 유아적 탐욕과 시기심이 작동해, 독설을 내뿜어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은 정신분석 선생, 클레스 전체, 특정 구성원의 정신을 난도질해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는 아무리 '말로 사죄'한다고 해서 온전히 보상되지 않음을, 그녀는 현실에서 고통과 더불어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정신에 '상징계 경계들'의 힘과 가치가 절감되고 조금씩 내면화되어 자리잡는 계기가 된다. 그녀의 애절한 간청에 홀연 눈물이 나왔던 나는 상처준 대상과 클레스 전체에 정중히 사과하고 3년간 정신치료를 받은 후에야 정신분석 클레스 참여를 허용하겠다 답하며, 적합한 치료사를 소개해 주었다. 4년후 어느날 그녀는 불연듯 클레스로 나타나 내게 인사를 하였다. 그녀의 얼굴엔 정신분석 선생을 이상화하던 예전의 (행복했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꼬박 3년간 약물치료 받느라)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며 지금의 현실에 적응하려는 변화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그녀는 선생을 다시 만나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구원해줄 것 같이 느껴졌던 유혹스런 그 대상이 어느날 자신을 무시하듯 외면해 버리는 나쁜대상으로 돌변하는 경험을 또다시 반복하진 않을까!하는 의심과 두려움이...) 나는 그녀를 과거로 퇴행시키지 않기 위해, 그날 강단에서 불안하고 나약한 내 모습을 의도적으로 조금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투명씨에 대한 안스러운 마음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 후 투명씨는 정신분석 수업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정신분석 클레스에 대한 나의 집착이 줄어들었다.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억울한 마음의 짐을 혼자 외롭게 짊어지고 사는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는 심정으로 출발한 정신분석 탐구와 강의 욕구가, 클레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적 계산과, 복잡한 여러 요인들에 의해 훼손된 여운이 남았다. 정신분석에선 '세팅'이 유독 중요하다. 정신분석가가 내담자에게, 정신분석 선생이 수강자에게 상대의 무의식이 원하는 뭔가를 온전히 채워주려면,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자극들의 침입으로부터 '분석 관계'를 보호해주는 '안정된 세팅'(환경)을 견고히 구조화해야 한다. 그 세팅은 분석가(선생) 혼자서가 아닌 내담자(수강자)와 함께 만드는 것이지만, 그 세팅을 성공적으로 정립했느냐 아니냐의 전체 판단과 책임의 상당 부분은 분석가(선생)에게 있다. 그 세팅 조건들 중 하나인 '정신분석 규칙 지키기'에는, 내담자(수강자)와 분석가(교육자)가 각각 지켜야 하는 기본 규칙이 있다. 가령 내담자에겐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거르지 않고 자유롭고 솔 직 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자유연상 규칙이 요구된다.(일대일 '분석 상황'일 경우, 투명씨의 원초적 말과 행동은 무의식을 드러내는 바람직한 '전이'적 자기표현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집단적 교육 환경의 경우, 함께하는 타인들의 권리와 심정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타자배려 규칙'이 '자유표현 규칙'에 우선한다. 이 규칙을 깨는 구성원이 존재하거나 존재하게 방치할 경우, 그 집단원들은 안전하지 않은(불편한, 오염된) 환경에 신경 쓰여, 선생의 능력과 말에 대한 신뢰와 집중이 힘들어진다. 아울러 특정인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병리적 기운과 사소한 나쁜자극에도, 집단원들의 정신이 전염 공명 마비되어, 집단분위기가 엉망이 된다. 분석가에겐 내담자의 특정 요소에 편향되지 않고 여러 요소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이는 '중립적 마음'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절제 규칙'이 요구된다. 정신분석을 교육하는 선생 역시 다양한 수강생들에게 고루 관심두는 중립의 마음과 거리 유지를 위해, 정작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애착하는 대상일수록 사소한 일상 관계(식사, 대화..)조차 더 신경써 절제해야 한다. 상대를 위해 상대에게 일상의 의식세계가 채워줄 수 없는 무의식의 뭔가를 활성화해 깨닫게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선 '정신분석 세팅'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날 투명씨의 'acting out'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그 하나로 (특정인의 '너무도 솔 직 한' 소리에 관심 끌려) 그 대상과 정신분석 클레스 전체에게 정신분석 수업 규칙을 미리 온전히 숙지시키지 못한 선생의 책임이 일부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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